우시산국(于尸山國)

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으로 신라 초기 복속된 주변에 있었던 소국이었다.

이 나라가 신라에 복속된 해는 열전에는 기록이 없으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이후 동국통감(東國通鑑), 동사강목(東史綱目)등에서는 탈해왕 23년조에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거도전에는 탈해이사금을 섬기던 거도(居道)가 마숙(馬叔)이라는 말달리기 놀이를 빙자하여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 : 지금의 경상남도 동래 또는 언양 지역의 소국)을 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높이 49.8(cm), 삼한시대

우시산국 지배계층의 무덤유적으로 하대 23호 무덤 출토 청동 솥은 울산지역의 정치적 실력자가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강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청동 솥을 수입해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따라서 하대유적은 문헌에 기록된 울산지역의 고대 정치체인 우시산국(于尸山國)의 지배계층 무덤유적이고, 대대리 일대가 정치적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오리토기 <하대유적지에서 출토>


고증:

울산의 옛 이름은 우시산국(于尸山國)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우시산의 ’(, 이두에서는 로 표기)와 합쳐져서 이 된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 거도편에 등장하는 우시산국은 어디일까? 전문가들은 울주군 웅촌과 지금은 양산시에 편입된 웅상면 지역이 우시산국의 중심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근거는 삼국사기에 전한다. 이에 따르면 신라 3대 석탈해왕 때 거도라는 사람이 우시산국을 굴복시키고 신라에 합병시켰다. 적어도 신라 초기까지는 이 지역에 국가형태의 집단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출처: 문화원형백과 삼국사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우시산국(于尸山國)

웅촌지역에 진한의 소국이었던 우시산국이 존재했던 것이다. 하대마을에서 검단리까지가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양산의 웅상읍까지 그 세력이 뻗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우시산국이전인 청동기시대 사람들도 이곳에 살고 있었다. 주로 하대마을과 검단리를 중심으로 보는 것은 이 주변에서 지석묘군과 고분군, ‘검단리 유적등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시산국은 몇몇 유적이 발굴되었을 뿐 정확한 위치나 규모를 알 수 없음에도 울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 때문에 그 나름의 의미가 크다.

 

우시산국은 기원후 80년에 사로국 탈해 이사금에게 정벌되었다. 한편 굴화리 주변에는 굴아화촌’, 혹은 굴지화국이 존재했다. 이곳은 태화강을 끼고 있으며 강이 휘어 있다는 의미로 굴아(屈阿)’라는 글자를 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언양읍 주변에는 거지화촌으로 불렸던 거지화국, 서생 주변에는 읍락의 형태인 생서량촌이 위치해 있었다. 부산지역의 거칠산국을 포함하여 모두 거도장군에 의해 멸망하였는데, 이후 신라의 세력 아래 자치권이 주어지는 방식으로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지역에서는 모두 후기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다.

출처: 키워드로 보는 울산 청동기문화 (제일일보 이정호 칼럼)

+ Recent posts